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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ention of the Chinese Communist Forces in the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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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는 중국의 수도 북경.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자,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은 중국에 특별사절단을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했다.

#2
이에 앞서 중국은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할 무렵 이미 만주 일대에 대규모의 병력을 이동 배치한 후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3
1950년 10월 4일.
모택동은 비상 최고 군사위원회를 개최하고, 6·25 전쟁의 개입을 결정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했던 10월 19일, 중공군은 “항미원조”의 기치 아래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무려 30개 사단 38만 명의 대병력이 10월과 11월에 걸쳐 평안북도 산간지역 깊숙이 잠입해 들어 왔다.

#4
그러나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6·25 전쟁에 개입한 사실을 모른 채,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선을 향해 북진을 계속했다.

#5
1950년 10월 25일.
한국군은 평안북도 온정리에서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당황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비로소 중공군이 6·25 전쟁에 개입한 사실을 알게 됐다. 중국에 대한 정보의 빈약함도 있었지만, 야음을 이용하여 기동하는 교묘한 위장 전술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6
야간전투에 능숙한 중공군은 무기의 빈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꽹과리, 나팔, 피리를 불며, 일시에 불개미처럼 떼를 지어 저돌적으로 공격해 왔다. 이것이 이른바 중공군의 인해전술이었다.

#7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통일을 눈앞에 둔 채, 작전상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8
1950년 11월 27일.
함경남도 장진호까지 진격했던 미 해병대는 중공군 7개 사단으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았다. 미 해병대 장병들은 혹독한 추위 속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면서 몇 번씩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흥남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9
여기는 당시 흥남부두.
동부전선으로 북진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서부전선 깊숙이 쳐 내려온 중공군으로 말미암아 육로가 막히게 되자,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피난하는 북한 주민과 함께 흥남에서 해상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10
38도선까지 침공해 왔던 중공군이 서울을 향해 신정공세를 취해 오자, 정부에서는 서울 시민들에게 피난령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1·4 후퇴였다.

#11
37도선 부근까지 밀렸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1951년 1월 25일 재반격작전을 개시했다.

#12
수도 서울을 되찾은 것은 3월 중순이었다. 그리고 38도선을 다시 넘은 것은 3월 하순이었다. 몇 번씩 밀고 밀리는 전쟁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한 노인은 태극기와 인공기를 같이 들고 한국군을 맞이한 일도 있었다.

#13
이 무렵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전세의 완전한 역전을 위해 만주 폭격을 주장했고,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 내의 국지전을 고집했다. 결국 맥아더 장군은 1951년 4월 11일부로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맥아더 장군 육성음)
맥아더 장군은 미국 의회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오직 사라져 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군복을 벗었다.

#14
맥아더 장군 후임으로 미 제8군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이 유엔군사령관으로 취임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지역의 확보보다는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으로 적을 완전 격멸한다는 작전 방침을 내세움으로써 6·25 전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